Posted at 2009.12.09 14:31 // in 그림들/그림과영상 // by ondori                                                



---->찾아보니 이렇다.

습의규격(習醫規格)


융경(隆慶) 신미년(辛未年)인 서기(西紀) 1571년 겨울에 노정화(盧廷和)와 하명선(何明善)과 이성(李星)과 조카 이시사(李時思)가 서로 일당(一堂)에 모여서 청(請)하는 말이 입문(入門) 책이 이미 권질(卷帙)이 다 편성(編成)되었으니 규격(規格)을 세워서 학습(學習)하지 않아도 좋겠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의사(醫師)란 인명(人命)을 병(病)의 위협(威脅)에서 건져내는 사명(使命)을 맡았으므로 마음의 바탕이 진실(眞實)하고 거짓이 없으며 성질(性質)이 안정(安靜)하고 침착(沈着)하며 음덕(陰德)의 공적(功績)을 쌓는 취미(趣味)를 참으로 아는 자(者)가 아니면 경솔(輕率)히 의술(醫術)을 학습(學習)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뜻을 이미 세웠더라도 상담 재량(裁量)을 하여 공부(工夫)해야 할 것이니 매일(每日) 일찍이 선천도(先天圖)를 상대(相對)하여 정좌(靜坐)하였다가 효경(孝經), 논어(論語), 소학(小學)을 대강 습독(習讀)하면 크게 자력(資力)을 얻게 될 것이다.
다음에 사서(四書) 전부(全部)와 고대(古代) 주역(周易)의 정문(正文) 및 서경(書經)의 홍범(洪範), 무일(無逸), 요전(堯典)까지를 읽을 것이다.
(대의(大意)만을 이회(理會)하기에 그치고 반드시 무리(無理)로 기억할 것까지는 없다.) 대저(大抵) 의사(醫師)는 유학(儒學)에서 발생(發生)하는 것이다.
독서(讀書)를 하여 이치(理致)에 밝지 아니하면 끝내 용속(庸俗)하며 어두워 모든 사리(事理) 변화(變化)에 대해 잘 소통(疏通)할 수 없을 것이다.
오전(午前)마다 입문(入門)의 대자(大字)로 된 글을 처음에서 끝까지 문단(文段)을 따라 외어서 읽어 가되 반드시 한 자(字)도 빠뜨리지 않아 마치 입에서 술술 나오는 것과 같이 하고 (만약 소아과(小兒科)를 전공(專攻)하고자 하더라도 역시 대방맥과(大方脉科)를 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외과(外科)를 전공(專攻)하고자 하더라도 역시 내과(內科)를 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저(大抵) 이것을 알고 있음으로 인(因)하여 저것을 알 수 있는 일은 있지마는 저것에 있어서는 잘 통달(通達)하는데 이것에 막히는 자(者)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경험(經驗)의 천심도(淺深度)와 생소(生疎)와 숙달(熟達)에 차이(差異)가 있게 되므로 분과(分科)의 부동(不同)이 있게 된 것이다.) 숙독(熟讀)한 후(後)에는 깊이 생각하며 묵상(黙想)을 하여 결국(結局)은 그 동안 의의(意義)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의난점(疑難點)이 있거든 고금(古今) 명가(名家)의 방서(方書)를 검사(檢査)하며 열람(閱覽)하여 듣고 보는 것을 넓히거나 혹은 덕(德)이 있고 고명(高明)한 선비한테 찾아가서 그 곡절(曲折)을 자세히 청(請)하여 질문(質問)할 것이다.
도절암(陶節庵)은 말하기를 “다만 속인(俗人)으로 더불어 말하지 않을 뿐이라.”고 하였으니 왜냐하면 대저(大抵) 방약(方藥)을 연구(硏究)하는 데 있어서 본초(本草)를 도외시(度外視)하거나 병리(病理)의 취향(趣向)을 연구(硏究)하는 데 있어서 소문(素問)과 난경(難經) 및 장중경(張仲景), 장자화(張子和), 유하간(劉河間), 이동원(李東垣), 주단계(朱丹溪)의 이론(理論)을 떠나서는 비록 소방첩법(小方捷法)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結局)은 전문학술(專門學術)이 있는 대가(大家)의 수효에 들 수 없는 것이니 조심하여 그런 점(點)에 잘못 미혹(迷惑)하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입문서(入門書)의 내용(內容)을 이미 다 통(通)한 뒤에야 한 소의(小醫)의 자격(資格)이 될 것이니 더욱 더 정좌(靜坐)를 하고 유서(儒書)를 대강 탐독(耽讀)하여 조금 음양(陰陽)의 소장(消長)하는 이치(理致)를 알게 되거든 자기(自己)의 경험(經驗)을 타인(他人)에게 경험(經驗)하여 보며 친(親)한 것으로부터 친(親)하지 아니한 멀고 생소(生疎)한 것에 파급(波及)하여 보되 스스로 헤아려서 실내(室內)에서 수레를 제작(製作)하였는데 이것을 밖으로 가지고 나가서 천하(天下)의 다른 거적(車跡)들과 합치(合致)될 정도(程度)의 정확성(正確性)을 자부(自負)할 수 있는 뒤라야 타인(他人)의 요구(要求)를 응(應)할 수 있는 것이다.


및 그 행지(行持)에 있어서도 더욱 정규(定規)가 없을 수 없으니 매일(每日) 오전(午前) 3~4시 경에 마음 속의 잡념(雜念)을 없애 맑게 하고 정좌(靜坐)를 하다가 조기(早起)를 하여 역시 유서(儒書)의 한두 가지를 대강 훑어보아 심원(心源)을 씻어 버려야 하고 (시시(時時)로 평단(平旦)의 기(氣)를 잃지 않고 유지시키는 것이 극치(極致)가 된다.) 및 환자(患者)를 위하여 진찰(診察)을 하려면 먼저 증상(證狀)이 어느 날부터 일어난 것과 종두지족(從頭至足)하는 문증법(問證法)을 상한(傷寒)의 초증(初證)과 잡증(雜證)에서 시행(施行)하는 방법(方法)에 의거(依據)하여 물어야 하고 및 내외상변법(內外傷辨法)으로 하나하나 자세히 문증(問證)을 할 것이다.
증상(證狀)이 비록 중(重)하더라도 병(病)의 문류(門類)가 명백(明白)한 자(者)는 꼭 맥(脈)을 보지 않고라도 역시 처방(處方)을 의정(議定)할 수 있는 것이지만 반대로 증상(證狀)이 비록 경(輕)하더라도 제목(題目)인 문류(門類)가 미정(未定)인 자(者)는 반드시 자세히 맥(脈)을 진찰(診察)하여야 할 것이니 (남자(男子)는 반드시 선좌수(先左手) 후우수(後右手)로 하고 여자(女子)는 반드시 선우수(先右手) 후좌수(後左手)로 진맥(診脈)을 하는 것이니 이것은 음양(陰陽)의 승강작용(升降作用)을 어기지 않고 순종(順從)하는 것이다.) 먼저 육부(六部)의 맥(脈)을 하나하나 단간(單看)을 하여 각(各) 경락(經絡)의 숨은 곡절(曲折)을 알아내고 다음에 총간법(總看法)에 의(依)해서 허실(虛實), 사생(死生)을 결정(決定)하는 것이다.
이미 진찰(診察)을 한 뒤에는 병가(病家)에 대(對)하여 반드시 사실(事實)로써 혹 허(虛)하다든지 혹 실(實)하다든지 가치(可治), 이치(易治), 난치(難治)의 예후(豫後)를 말하여 주고 어느 정도(程度)의 증후(證候)가 있으리라는 것을 말하여 자기(自己)의 정신적(精神的) 추리(推理)가 맞나 안 맞나를 징험(徵驗)할 것이다. 만일 진찰(診察)이 미급(未及)하여 잘 알 수 없는 점(點)이 있는 것은 정직(正直)하게 설명(說明)하여 주고 억지로 꾸며대는 것은 안 되며 급박(急迫)하지 않게 조용히 헤아려 평론(評論)하기를 힘쓰고 급박(急迫)하며 과격(過激)하게 언동(言動)하여 공포(恐怖)에 이르게 하지 말 것이다.
만일 부녀(婦女)를 진찰(診察)할 때에는 반드시 그 지친(至親)한 사람한테 의뢰(依賴)하여 먼저 증상(證狀), 색상(色象), 설상(舌狀)과 음식(飮食)의 실정(實情)을 문진(問診)한 후(後)에는 편의(便宜)를 따라 혹 증상(證狀)이 중(重)하여 와상(臥床)에 누워 있거든 장막(帳幕)을 사이에 두고 진찰(診察)하고 혹 증상(證狀)이 경(輕)하여 문(門)까지 나올 수 있거든 유막(帷幕)을 사이에 두고 진찰(診察)을 하되 이 때에 역시 반드시 얇은 비단천으로 환자(患者)의 손을 덮고 진찰(診察)을 할 것이다. (빈가(貧家)는 불편할 것이니 의자(醫者) 자신(自身)이 얇은 비단천을 소매 속에 준비하고 다녀야 한다.) 과부(寡婦)와 처녀(處女)에 대해서는 더욱 더 경근(敬謹)을 하여야 하는 것이니 이 점(點)은 소절(小節)이 아니다.
병(病)을 비유하거나 설유(說諭)하여 주는 경우에는 모름지기 명백(明白)히 개론(開論)하여 구별(區別)을 하되 내상외감(內傷外感)이 되었다든가 혹은 잡병(雜病)에 속(屬)한다든가 혹은 음허(陰虛)에 속(屬)한다든가 혹은 내상(內傷)에 외감(外感)의 기분(幾分)을 겸(兼)하였다든가 혹은 외감(外感)에 내상(內傷)의 기분(幾分)을 겸(兼)하였다든가를 판단(判斷)해 주어야 하고 처방(處方)을 논(論)할 때는 맥상(脈象)에 의거(依據)하여 정(定)하되 조금이라도 감추는 일이 있으면 안 되며 고대(古代) 기법(旣法)에 의거(依據)하되 현시(現時)에 대(對)한 적합성(適合性)과 나이와 환경(環境)의 순역(順逆) 및 과거(過去)에 있어서 모약(某藥)을 먹은 여부(與否)와 여자(女子)는 월경(月經), 태산(胎産)에 대한 것, 남자(男子)는 성교(性交), 노동(勞動), 안일도(安逸度)에 대한 것을 참작(參酌)하여 대처(對處)할 것이니 모든 것을 비록 옛 것에다 근본(根本)을 두는 것이나 옛 것 그대로를 구애(拘碍)하여 고집(固執)하지 말고 참으로 마치 그 환자(患者)의 장부(臟腑)를 들여다보듯이 확신(確信)을 가진 뒤라야 차심(此心)이 무의(無疑)하게 될 것이며 환자(患者)도 역시 원통하고 억울하게 잘못 되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용약(用藥)할 때에는 더욱 마땅히 자세히 하여야 하니 어떤 경락(經絡)의 병(病)이므로 모약(某藥)으로 군약(君藥)을 삼아야 하고 모약(某藥)으로 감제약(監制藥)을 삼아야 하며 모약(某藥)으로 인경보사(引經報使)를 하여야 한다는 것을 확실(確實)히 할 것이다.
무릇 약재(藥材)의 제료(劑料)는 본래(本來) 마땅히 의가(醫家)에서 준비되어야 비교적 약(藥)의 신채(新採)와 진구(陳久)한 것과 포(炰)와 구(灸)의 수치(修治)를 일일이 법칙(法則)에 맞게 할 것이다.
하물며 긴급(緊急)을 필요(必要)로 하는 환산약(丸散藥)은 어찌 병가(病家)에서 잘 졸지(卒地)에 준비할 수 있는 것이랴? (의자(醫者)만이 평소(平素)에 준비하여 둘 수 있는 것이다.) 단(但) 병가(病家)에서 반드시 자제(自製)를 하고자 하는 자(者)가 있거든 그 의향(意向)을 들어주되 반드시 본초(本草) 주(註) 밑에 쓰여 있는 고법(古法)에 의(依)하여 수합(修合)하여야 하고 제 마음대로 기교(技巧)를 부려서 약력(藥力)을 손상(損傷)시키면 안 된다.
병(病)의 기전(機轉)에 있어서도 조금이라도 의문점(疑問點)이 있거나 약효(藥效)가 그다지 없는 환자(患者)에 대해서는 오전(午前) 3~4시 경 일어나 정좌(靜坐)하여 심사(深思)하여 그 근원(根源)을 추구(推究)하여서 재차(再次) 진찰(診察)을 하여 개방(改方)을 하면 반드시 낫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치병(治病)을 하여 병(病)을 고치게 되는 것은 역시 의가(醫家)의 분수(分數) 안에 있는 당연(當然)한 일이니 자랑할 것도 없는 것이다.
비록 청백(淸白)을 지키며 의사(醫師) 노릇을 하여 생활(生活)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역시 금품(金品)을 과(過)하게 받거나 중가(重價)를 달라는 것은 불가(不可)하니 다만 마땅히 그 보수하는 바를 따라야 한다.
만일 병가(病家)가 적빈(赤貧)하다면 조금도 받지 말 것이니 이러하면 더욱 그 인(仁)하며 청렴(淸廉)한 기개(氣槪)를 나타내게 될 것이다.
대저(大抵) 사람이 갚지 못하면 하늘이 반드시 보답(報答)할 것이니 이같이 하여 입심(立心)을 함에 있어서 의술(醫術)이 불명(不明), 불행(不行)이 되는 자(者)가 있으리오!


하명선(何明善)이 또 나와서 말하기를 “선생(先生)님의 가르치심을 자세히 알았습니다마는 단(但) 저희들의 학업(學業)이 성차(成次)를 이룰 수 있을는지요?” 저자(著者)가 대답(對答)하기를 그대들은 다 오래된 훈신세가(勳臣世家)로 유(儒)를 닦아 왔고 또 매우 정세(精細), 명백(明白)하며 감각(感覺)이 민첩(敏捷)하니 타일(他日)에 크게 깨닫게 되는 바가 있을 줄 아니 번거롭지만 소문(素問)과 본초(本草)와 아울러 동원십서(東垣十書)와 유하간(劉河間)의 원병식(原病式)을 가져다가 번잡한 점(點)을 삭제(削除)하며 잘못을 개정(改正)하고 다시 사방(四方) 현철(賢哲)의 힘을 모아서 앞에 말한 경서(經書)와 본초(本草)를 가져다가 합(合)해서 의학대전(醫學大全)을 만들되 고금(古今)의 방론(方論)을 모두 부입(附入)하고 혹은 주해(註解)를 하여 놓을 것이니 이런 뒤라야 의서(醫書)와 유적(儒籍)이 다같이 지금 같은 청명(淸明)한 시대(時代)에 빛나게 될 것이요 자네들도 역시 중토(中土)인 중국(中國)에 태어난 사람의 긍지를 저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하명선(何明善)이 말하기를 “새로운 주견(主見)이 있은 뒤에 저서(著書)를 할 수 있는 것이니 소자(小子)는 입문(入門)만 잘 알게 되면 족(足)합니다.”
저자(著者)가 말하기를 입문(入門)은 속성(速成)하는 지름길과 같은 종류에 지나지 않는다. 하물며 집서(集書)는 저서(著書)와 다른 것이다.
예(例)를 들면 장중경(張仲景), 장자화(張子和), 유하간(劉河間), 이동원(李東垣), 주단계(朱丹溪)와 같은 사람은 전인(前人)이 발명(發明)하지 못한 것을 발표(發表)하였으니 이야말로 독득(獨得)한 견식(見識)이므로 참으로 애중(愛重)할 만하며 후세(後世)에 전(傳)할 만한 것이지만 내가 모아 놓은 것 같은 집서(集書)는 고인(古人)의 진구(陳舊)한 말을 차례로 유별(類別)한 것에 불과(不過)한 것이다.
필기(筆記)를 하려고 할 때에 이미 그 속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 있거늘 이것을 만약 마음대로 자기(自己) 주견(主見)대로 하여 놓으면 허명(虛名)을 무릅쓰는 것이며 저자(著者)의 본의(本意)를 배반하는 것이니 매우 부끄럽고 두려운 점(點)이려니와 하물며 병고(病苦)로 시달려서 뼈가 높게 나타났고 일찍이 친(親)히 실행(實行)하여 보지 못하였으니 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다만 호생(好生)하는 일념(一念)만을 유지키 위하여 동지(同志)로 더불어 같이 내상외감(內傷外感)의 문호(門戶)를 지켜 잘못이 너무 심(甚)한 정도(程度)에 이르지 않도록 하고자 함이니 만약 반드시 알기를 참되게 하며 실행(實行)을 숙련(熟練)되게 하고자 한다면 오직 그대와 노우(盧友) 정화(廷和) 뿐이라고 생각하니 보다 더 이런 점(點)에서 힘을 써야 할 줄 안다.


노대애(盧大藹)가 나서서 하는 말이 “저는 체질(體質)이 약(弱)하고 둔(鈍)하니 감(敢)히 한마디를 청(請)하여 집약(集約)을 삼을까 합니다.”
저자(著者)가 대답하기를 사람을 기만(欺瞞)하지 않을 뿐이니라. 입문서(入門書)를 읽되 첫머리부터 끝까지 영활(靈活)하며 정통(精通)하여 숙달하지 못하고 그 중의 일방(一方), 일론(一論)만을 잘 익혀 가지고 곧잘 의치(醫治)를 한다고 떠드는 자(者)는 기만(欺瞞)이다.
상세(詳細)하게 숙독(熟讀)을 하였더라도 그 전부(全部)를 참합(參合)하여 철저(徹底)히 관통(貫通)해야 한다는 점(點)을 생각하지 않는 자(者)도 기만(欺瞞)이다.
깨달은 후(後)에도 조기(早起)하여 정좌조식(靜坐調息)을 하여 진찰(診察)할 마음의 소지(素地)를 만들지 않는 자(者)도 기만(欺瞞)이다.
진맥(診脈)을 하고 나서 사실(事實)대로 말해 주지 않는 자(者)도 기만(欺瞞)이다. 처방(處方)을 의논(議論)하며 약(藥)을 쓰는 데 있어서 거칠고, 정밀(精密)하며 상세(詳細)하지 않은 자(者)도 기만(欺瞞)이다.
병(病)이 나은 후(後)에 금품(金品)을 과(過)하게 요구(要求)하여 시장(市場) 맛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者)도 기만(欺瞞)이다. (대저(大抵) 의사(醫師)는 이익(利益)이 없으리라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특(特)히 자기(自己)의 의술(醫術)이 불명(不明)하다는 것을 근심하여야 한다.) 여러 번 쓰고 여러 번 경험하여 심득(心得)한 것이 있는데도 불구(不拘)하고 이것을 편집(編集)하여 천지신명(天地神明)의 작용(作用)을 보조(補助)하며 갚아주며 인류(人類)에게 공익(公益)을 하지 않는 자(者)도 역시 기만(欺瞞)이니 기만(欺瞞)을 하면 천부(天賦)의 양지(良知)가 날마다 가려지고 막히게 되어 의도(醫道)를 끝내는 잃게 되지만 기만(欺瞞)을 하지 않으면 양지(良知)가 날마다 더욱 발양(發揚)하게 되어 의도(醫道)가 더욱 더 창성(昌盛)할 것이니 기만(欺瞞)과 불기만(不欺瞞)의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할 것이냐는 타인(他人)이 잘 참여(參與)할 수 있는 점(點)이 아니라고 말하였더니 하명선(何明善)이 서로 이끌어 절을 하고 하는 말이 “감(敢)히 마음 속에 맹세하여 바르게 입지(立志)를 하여서 선생(先生)님의 도덕적(道德的)인 교육(敎育)을 계승(繼承)하지 않으리오.”하고, 이에 盧大藹에게 완전(完全)히 탈고(脫稿)한 원고(原稿) 수(數)의 반(半)을 소매 속에 간직하여 가지고 건녕부(建寧府)로 가서 족질(族姪)인 이시사(李時思)한테 그림과 베끼는 것과 교정(校正)을 의뢰(依賴)하여 장차 통가(通家)가 되는 양간(楊幹), 양주(楊柱), 여윤룡(余允龍), 이구(李昛)와 아울러 친우(親友)의 상신자(相信者)에게 일질(一帙)씩 나눠서 전(傳)하여 주기로 하였다. 때는 기묘년(己卯年)인 서기(西紀) 1579년 (당판(唐版)에는 임신(壬申)인 서기(西紀) 1572년) 중춘(仲春)에 쓴 원고(原稿)이다.


만력(萬曆) 경진(庚辰) 중춘(仲春) 초길(初吉)에 남풍(南豊) 건재(健齋) 이천(李梴)은 근서(謹書)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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